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26 사건 (문단 편집) == 기타 == >“우리가 미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고, 마침내 한길로 치솟을 뿐!” >---- >— 노나카 시로 대위 * 당시 [[영친왕]]은 [[일본 제국 육군|일본 육군]] [[대령|대좌]]로서 도쿄 근처에 있는 우츠노미야 59연대 연대장이었다. 2월 28일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연대에서 긴급하게 차출한 혼성대대를 이끌고 상경해 29일 0시에 [[신주쿠역]]에 도착하여 구단에 있는 호텔에 주둔하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치했다. 2월 29일에 반란군이 와해되었으니 대치는 그리 길게 끌지는 않았다. * 당시 주동자들은 처형당하고 병 등 단순 가담자들은 "국가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으니 국가를 위해 죽어라"는 명목으로 만주로 부대째 배치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인맥으로 [[만주군]]으로 복무한 자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건국동맹]]에 가담했던 [[박승환(군인)|박승환]]은 만주군 내부에 있는 이런 '불순자'들의 협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주동자 중 종신형 판결을 받은 생존자인 이케다 토시히코(池田俊彦) 소위는 당시 오카다 케이스케 총리 관저 습격사건에 가담한 8명 중 하나로 유일하게 [[종신형]] 판결을 받고 치바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때 '''감방 동기 중 한 사람이 바로 [[박열]]이었다'''고 한다.[* 이케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박준식이라고도 하는 남자에게 왜 항일운동을 하게 되었느냐 물어보았더니 '[[문경시|자신의 고향]]에서는 풍년이 들 때 돈을 빌려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 찾아가면 선심을 쓰면서 안 갚아도 된다고 돌아가게 했는데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알고 바로 찾아가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했다. 그래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을 많이 보고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었다. '''왜냐하면 [[오사카부|내 고향]]에서도 똑같은 수법으로 땅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박열 씨는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1941년에 출소한 그는 평생 일반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먼저 간 동기들의 명복을 빌었고 1980년대에 당시 사건기록을 촬영·복사하려 했다가 그러지 못하자 피고인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도쿄지방재판소 문서고에 찾아가 직접 열람하고 내용을 한 자 한 자 '''필사'''하여 세상에 공개했으며 이 기록은 2·26 사건에 대해 가장 신뢰성이 높은 사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케다 토시히코는 이후에도 NHK 2·26 특집 다큐에 출연해 증언하기도 했고 수십년을 살면서 쇼와 덴노의 죽음도 목격하고 2002년에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 [[다카히토|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훗날 [[요미우리 신문]]과 2·26 사건을 회고하는 인터뷰에서 '''"만일 [[쇼와 천황|형님]]을 정말 신으로 섬겼더라면, 어떻게 반란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이는 반란군 역시 천황을 신으로 숭배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메이지 유신]] 자체가 권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천황을 팔아 '쇼군이 행사하던 국권을 본래대로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시작했고 이것저것 서양의 절대군주와 같은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다 붙이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한 얼굴마담으로 천황을 내세운 것뿐이었다.] * [[하타 야와라]] 전 [[사이타마현]]지사가 [[이등병]] 시절 반란군 부대에 있어서 상관의 명령으로 [[경시청]]을 점거했다고 한다. * 당시 [[아사히 신문]]사도 반란군들의 표적이 되어 습격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고 반군이 윤전기를 때려부수는 데 그쳤다. * 이 사건과 5·15 사건에는 아주 골 때리는 공통점이 있는데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니치렌종이라는 [[불교]] 종파가 사상적으로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2·26 사건의 사상적 지도자 취급을 받으며 총살당한 기타 잇키와 5·15 사건의 배경이 되는 혈맹단 사건의 이노우에 닛쇼와 그 스승격인 다나카 지카쿠가 일련종 신도로 시작했고 법화혁명을 주장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 다만 다나카 지카쿠는 니치렌을 강조하면서 [[불교]]와 국가의 통합을 주장한 극우파 사상가가 되었고 기타 잇키는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니치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하면서 좌익 법화혁명 드립을 쳤다는 차이가 있다. 덤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시하라 간지]] 역시 다나카 지카쿠의 열렬한 숭배자로 거의 오컬트 수준인 국가전략을 꺼내들었으니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데에는 일련종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창가학회]]의 경우 [[군국주의]]에 저항하다가 교주가 투옥되고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이시하라 간지는 사건 발생 2일차에 육군대장 마사키와 단독 대담을 통해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 이 사건 이후 [[아베 사다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베 사다를 2·26 사건으로 어두워진 사회 분위기를 밝혀 주는 여신 같은 존재로 떠받들기까지 했다. * [[김재규]]는 [[10.26 사건]] 이후 재판정에서 2.26 사건 당시 주동자들만 사형당했음을 언급하며 "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부하들을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와 각별한 사이였던 [[이종찬]]은 김재규의 변호인단에 2.26 사건 관련 판례 자료를 건네며 '김재규는 어렵더라도 그의 부하들은 구명해보라'는 의향을 전하기도 했다. * 이 사건에 사상적 영향을 미친 기타 잇키는 천황 신격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참고로 기타는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당시 [[박열]]을 피신시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 우익 노선과 사회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짬뽕된 경우라 행적에 모순점이 꽤 생긴 듯하다.] 기타는 "천황의 일본과 그 국민"을 "일본과 그 국민의 천황"으로 뒤집으려 한 인물로서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기타에게 천황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87626&cid=50293&categoryId=50293|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를 할 '''연장'''일 뿐이다. [[후세 다쓰지]]조차 대가 끊어져 천황제가 자연소멸하기를 바란 걸 생각하면 기타가 얼마나 골때리는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기타의 영향을 받은 2·26 청년장교들은 천황을 도구로 삼는다는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진심으로 천황에게 충성했고, 이것이 그들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되었다. 함께 총살되던 청년장교들이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기타는 거부했다. 기타의 [[사세구]]는 “[[히로히토|어린 임금]][* 와카도노(わかとの)는 도련님이 아니라 유주(幼主)다. [[https://ja.dict.naver.com/#/entry/jako/e15899a7d10744528167199160cbcc9d|참고]] [[단성소]]에서 선왕의 고아 운운하듯이 비꼰 것이다.]에게 [[황도파|투구]] 뺏겨 [[2·26 사건|진 싸움]]([ruby(若殿,ruby=わかとの)]に [ruby(兜,ruby=かぶと)][ruby(取,ruby=と)]られて [ruby(負,ruby=ま)]け [ruby(戰,ruby=いくさ)])”이다. * 당시 쿠데타 주역들이 부르던 군가인 [[쇼와유신의 노래]](昭和維新の歌)[[http://youtu.be/MMAkREdMNgo|#]]는 [[금지곡]]이 되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작사자 미카미 다쿠(三上卓)는 [[5.15 사건]]과 패전 이후 [[삼무사건]]에 참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 위의 2월 29일 살포된 삐라는 2010년대 후반 들어 각종 [[패러디]] 소재로 활용되었다.([[https://twitter.com/search?q=%E3%83%8B%E5%91%8A%E3%82%B0&src=typed_query&f=image|트위터 이미지 검색에서 ニ告グ(에게 고함)으로 검색한 결과]]) * 2·26 사건 중 일부 궐기군 병력들이 봉쇄망을 뚫고 당시 참모총장이자 의친(懿親)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의 왕부(王府)에 가서 그가 자기네들 앞에 나타나서 자기네들의 주장을 쇼와 덴노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으나 결국 간인노미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 해군 군령부가 작성한 해군 기밀문서가 2019년에 공개되었는데 해당 문서에서는 해군측 역시 사전에 이런 것이 벌어질지 알았고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했는지 사건 발생 직후에는 당시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거의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 기밀문서 기록에 의하면 해군성 당직사관이 해당 사건에 대한 초동 보고를 들은 게 오전 7시였고 그때조차도 간략하게나마 상황 파악을 했고 이후 해군으로 실시간으로 들어온 정보들은 사건 종료 후 수사를 통해서 밝혀진 진실과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었다고 한다.]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신속하게 궐기군들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감시초소 수 개소를 설치하여 실시간으로 궐기군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육군이 설치한 계엄사령부에 해군 장교를 신속하게 파견하여 육군측 동향을 살피고 궐기군이 점거한 주요 국가 시설들에게 사복차림을 한 첩보요원들까지 동원하여 정보수집에 나서며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쇼와 덴노와 당시 해군 군령부 총감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간의 대화나 육군대신이 궐기군들과 대화를 마친 다음에 부른 육군 내 궐기군측에 호의적인 마사키 대장과의 대화, 마사키 대장과 이시하라 간지 당시 대좌간의 단독 대화, 근위사단 대위와 궐기부대 간부가 문부대신 관저에서 가진 대화 등도 상당히 상세하게 파악할 정도의 고퀄리티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해군 첩보요원들이 얼마나 폭넓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참고로 해당 기밀문서는 일제가 패망할 당시 해군 군령부 사령관으로서 미주리함에서 패전 서명식에 참석했던 토미오카 해군 제독([[소장(계급)|소장]])이 패전 후에 문서고 깊숙한 곳에 숨겨버린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 쇼와 덴노는 말년까지 이 사건의 [[PTSD]]에 시달렸다. 매 해마다 2월 26일이 되면 잠들기 전 시종에게 도쿄 내 특이사항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고 먼 훗날 자신이 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2개의 사건들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2차대전 패전. * 해군측 기밀문서에 의하면 그동안 해군에 동조자가 없었다는 추론과 달리 오가사와라 예비역 중장이 사건발생 이틀째 후시미노미야 친왕 등을 위수로 한 해군 고위층들과 접촉하여 이들에 협조하도록 설득했다는 게 밝혀졌다. * 5·15 사건 당시 암살 대상이 되어 암살될 뻔했던 [[찰리 채플린]]은 이때도 도쿄에 있었다. 4년만에 일본을 다시 방문해 도쿄에 머물던 차에 2·26 사건이 터졌던 것. 그나마 이때는 5·15 사건과는 달리 채플린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 [[https://youtu.be/TtwlLf5S-3Y|*]] 관련 인물들의 실제 사건 당시 전화 녹취록이 남아있다. * 5·15 사건과 함께 일본 정치인들에게 '''총리 공관에 귀신이 나온다'''는 [[미신]]이 퍼지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며, 지금도 일본 총리들은 총리 공관에 거주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 이 사건은 중국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는데, 황도파는 '''반소련''' 통제파는 '''반중국'''을 공개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2·26이 진압된 다음 해인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 사건 당시 [[소련]] 스파이인 [[리하르트 조르게]]도 [[도쿄도|도쿄]]에 있었다. 현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조르게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사건에 대한 정보, 심지어 황도파와 통제파의 성향까지 상세히 조사해 소련과 독일에 보고서를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